SLEEP 01  ▒▒▒▒▒▒▒▒▒▒▒▒▒▒▒▒▒▒▒▒▒▒

밤새 비를 퍼부었다고 한다.
하늘이 노한 것 같이, 천둥 번개까지
아주 무서웠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하늘이 노한지도 모르고
폭신한 베개와 포근한 이불 속에서
맘편히 잠을 자고 있었다.


축축한 낙엽들과 묵직해진 나뭇가지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괴성을 지르고 난리를 피울때
난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단절하며
세상에 없었다.  

....


작은 부르럭 거림에도
번쩍 눈을 뜨는 나였는데...
...
..


지난 주 잠자는 사이에 왔던 2통의
셀루러폰 기록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요사이 난 이런 경험을 많이 한다.

'원래 이랬던 나였는데...'하는 의아함 말이다.


예민함이 무뎌지고
무딤이 예민해지고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이 좋아지고

목마름이 무관심해지고
무관심의 대상이 간절해지고


극과극이 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나를 잃어버리고는
다른 나를 찾기도 한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부분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내가 변하니
시간이 지나면 나를 알게 될꺼란
기대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결국 나는..

이리저리 바뀌는 사람이야...


SLEEP 02  ▒▒▒▒▒▒▒▒▒▒▒▒▒▒▒▒▒▒▒▒▒▒

장농 밑 세상같이
잃어버린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산다고 하는 블랙 홀의
초대를 받았다.

살면서 이런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홀속으로 몸을 던졌다.

부러진 검정 크레파스가 깡충깡충 뛰어와
나를 맞는다. 그를 기억해 내지 못 해 미안 했지만
부러진 검정 크레파스는 문제도 아니란 듯 말했다.

"어차피 이곳은 잊혀진 존재가
존재하는 곳이니까요."

나는 온갖 나의 것이라 하는 사물들의 수다속에서
한참을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저쪽 한 구석에는 스파이더맨 새파란줄의
전자시계가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는데
부모님께 선물로 받고 마냥 행복해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반가운 맘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시간창에
불을 밝혔다 껐다 하며 시간을 읊었는데
그 시간은 규칙성 없이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무의미해요.
그냥 난 내 모습을 끄집어 낼 뿐이죠 ..."

그 순간 난 몸의 들림을 느꼈고
공간은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짙은 어둠속에서 의미를 잃었고
난 두려움에 청각으로 모든 감각을 옮겼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무슨 발자국 같은 소리가 저벅저벅
가까와 지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는
들리는 듯 한데 이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닌 그냥 그렇다고 느껴지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언가 새로운 어떤 것이었다.

양으로만도 꽤 많은
새로운 그 어떤 경험들을 겪은 후

- 그 경험을 뭐라 이름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

어둠속에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
나는 이유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젠 기억해도 될만큼 당신은 성장했어요.
저를 잃어버리지 마세요. 전 결코 사라지지 않거든요."

내 안에 거부하고 잃어버리도록 묻어 두었던  
상처들과 치부, 아픔들이 그 새로운 경험으로 속삭였다.  

순간 마음은 봄날처럼 찬란하게 빛이 내렸지만
눈에는 눈물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앞에 펼쳐진 건
멋진 수풀이 우거져 꽃잎이 날고 새와 나비가 흐느적 대며
또 그 수풀에 파란 하늘까지 반사되는 넓고 푸른 호수였다.

난 이름도 장소도 모른 채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그리움의
그 장소가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질 않았다.

블랙홀은 정말 대단한 곳이구나...

난 호수에게 이름과 위치를 물었지만
호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내게 메아리조차
건네 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잊혀진 사람들을 찾고 싶었다.
실은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이곳에 망설임없이 손을 뻗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도 만날 수 없어!"

"왜죠?"

"너도 누군가에게 잊혀진 존재이기 때문이지..."

나는 그 음성이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목소리의 위엄앞에 질문을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어디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는 순간. 순식간에 진공 청소기에 빨리듯
몸이 들려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나 둘씩 블랙홀 전체의 모습이 눈아래에
펼쳐지기 시작했고 이제 이별하자는 무언의 명령이
느껴졌다.

'아직, 난 준비가 안 되었는데...'

서둘러 눈 앞에 보여지는 나의 잃어버리고
잊혀진 것들을 마구마구 눈에 넣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본 모든 것들은 이곳을 떠나는 순간
기억에서 사라질 꺼예요. 대신 이곳의 기억은
다시 이곳에 저장되게 됩니다."

회색공간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의 기억속에 있든 없든 당신과 관련되어
잊고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당신과 또 한번 이별을 합니다."

휘리릭....

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무슨 눈물을 이렇게 많이 흘렸지?'

축축한 베개를 보고 이마를 닦으며 이상해 하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작년 이맘 즈음에 장농밑에 또로록 숨어버린
500원짜리 동전이 아직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SLEEP 03  ▒▒▒▒▒▒▒▒▒▒▒▒▒▒▒▒▒▒▒▒▒▒

긴 잠에서 깬 것 같다.
오랜만에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쓴다.

그냥 여느 바람이라 생각했던 바람이

"난 가을 바람이라니깐..."

이라며 제법 세차게 머리를 흩날렸는데
아마도 그때 정신이 든 것 같다.

여행 갈 형편도 아니고, 게으르기까지 해져서
그냥 편한 과거여행을 꿈속에서 떠났다.

눈을 뜨자마자 사라진 꿈속 여행이긴 하지만
아마도 위와 같은 꿈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래서 인지
자고 났는데도 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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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 어딘가에
어떤 블랙홀이 있어서,
그 곳에 가면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바쳤던 나의 사랑'이
'한때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위안이 된다.


지금은 모두 잊혀진 한 순간의 사랑들,
그들이 이 우주에서 완전하게 사라져서
결국은 無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사랑 같은 건 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황경신의 [그림같은 세상] 중에서